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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내용

 

1차 페스트 범유행(541~750): 이집트에서 시작해 지중해 세계(유스티니아누스 페스트)를 거쳐 북서 유럽으로 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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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페스트 범유행(1345~1840): 중앙아시아에서 시작해 지중해를 거쳐 유럽으로 전파되었고, 중국 쪽으로도 전파

 

3차 페스트 범유행(1866~1960년대): 중국에서 시작해 전 세계로 전파, 특히 미국 서해안과 인도의 피해가 심했다.

 

고대와 중세: 기원전 800~ 기원전 612

 

쥐/픽사 베이

 

페스트 유행이 최초로 기록된 것은 히브리어 성경(타나크의 사무엘상 5장)이다. 아슈도드(아스돗)의 블레셋 인들이 야훼를 모신 계약의 궤를 훔쳐간 죄로 페스트에 걸려 고통받는 내용이 나온다. 블레셋 인들이 겪은 증세를 "종기"(종양, 악성 종양)라고 번역하는데, 선페스트로 인한 가래톳을 묘사한 것으로 보이며 페스트로 인해 블레셋 인들의 인구는 크게 줄었다.

 

투키디데스는 기원전 430년인 펠로폰네소스 전쟁 2년 차 때 에티오피아에서 시작된 유행병이 리비아와 이집트를 거쳐 그리스에 상륙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테네 인구 중 3분의 1이 아테네 역병으로 죽었으며, 아테네의 지도자 페리클레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현대의 역사학자 사이에서는 아테네의 패전에 역병이 미친 영향을 놓고 이견이 분분하며 역병의 정체는 오랫동안 페스트로 생각되어 왔다. 오늘날 학자들은 천연두, 티푸스, 홍역이 기록된 증세와 더 일치한다고 보고 있었으나 최근 역병 사망자의 치수에서 발견된 DNA를 분석한 결과, 장티푸스가 유력한 용의선에 올랐다.

 

1세기의 페스트

 

-  그리스 해부학자 에페소스의 루푸스:  이집트, 시리아, 리비아에 역병이 발생했다고 기록했다.

- 디오스코리데스와 포시도니우스라는 알렉산드리아의 의사 두 사람:

급성 발열, 불안, 통증, 섬망 등의 증세를 기록, 감염자에게는 팔꿈치 주위, 무릎 뒤 등에 크고 단단한, 그러나 화농은 아닌 덩어리가 생겼으며 감염자의 사망률은 매우 높았다.

- 루푸스: 기원전 3세기 알렉산드리아에서 의학을 수학한 디오니시오스 쿠르토스도 유사한 덩어리 증상을 보고한 바 있다고 썼으며 그의 기록이 정확하다면 지중해 동부는 일찍부터 선페스트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세기의 페스트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 황제의 이름을 딴 안토니우스 역병이 발생했으며 이 역병을 처음 처치하던 갈레노스의 이름을 따 갈레노스 역병이라고도 부른다.

- 이 역병은 페스트가 아니고 천연두일 가능성도 있으며 갈레노스는 역병이 로마에 들이닥친 166년과 아퀼레이아에 주둔한 군단병들 사이에 역병이 돈 168년에서 169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에도 현장에 있었다.

- 갈레노스: 능숙하게 병을 다루었고, 병의 지속 기간이 길며 그 증세가 어떠하고 처치법은 어떠한지를 상세히 기록했다. 갈레노스의 기록들은 파편화되어 남아 있는 것은 매우 짧다.

- 바르톨트 니부어: 이 악성 전염병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맹위를 떨쳤으며 셀 수 없는 희생자가 발생했다. 고대 세계는 M. 아우렐리우스의 치세 때 들이닥친 역병으로 인한 변화를 결코 되돌릴 수 없었다.” 역병의 사망률은 7~10퍼센트에 달했다. 165년에서 166~168년의 역병은 대략 350만에서 500만 명의 희생자를 낳았다.

- 오토 시크: 로마 제국의 인구 절반 이상이 죽었다고도 생각했다.

- J. F. 길리엄: 안토니우스 역병이 3세기 중반 이전 로마 제국에서 발생한 그 어떤 전염병보다도 많은 사망자를 냈다고 말한다.

 

이후 페스트는 인류 역사상 세 번에 걸친 범유행을 일으켰다. 각 유행의 정확한 시작과 종료가 언제인지는 아직 논쟁 대상이며 벨먼트대학교의 조지프 P. 바인에 따르면 세 차례 범유행은 다음과 같다.

 

1차 페스트 범유행(6세기~8세기)

 

- 유스티니아누스 페스트라고 불리며, 541년에서 542년까지 동로마 제국, 지중해 연안, 사산 제국 전역에 걸쳐 발생한 페스트 범유행이다.

- 재유행은 750년까지 진행되었다.

- 역사상 가장 끔찍한 페스트 범유행 중 하나였으며, 2500~5000만 명이 사망했다.

- 역사가들은 2세기 후에 재발한 것까지 계산하면, 사망자가 12000만 명까지 이르렀다고 추정, 이 인구는 유럽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2차 페스트 범유행(14세기~19세기)

 

- 독일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의 요하네스 크라우스 박사와 영국 스털링대의 필립 슬라빈 교수 공동 연구진이 2022년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에서 페스트가 발병했다.

- 1338년 북쪽의 이식 쿨 호수 근처에 매장된 시체의 묘비에는 시리아어로 이곳은 유행병(페스트)으로 죽은 신자 산마크의 무덤이라고 적혀 있었다.

- 산마크는 실크로드 무역에 종사하는 상인이었으며, 유행병에 감염되어 사망한 상인은 116명에 이른다.

- 막스 플랑크 연구소 과학자들이 키르기스스탄 무덤의 치아에서 DNA를 추출해 분석한 결과, 유럽을 휩쓴 페스트균이 돌연변이를 일으키기 전 형태와 일치했다.

- 무덤의 페스트균은 오늘날 이식 쿨 호수 근처에 사는 설치류의 페스트균과도 유사했다.

- 연구진은 14세기 기상이변으로 텐산산맥에서 설치류인 마멋이 폭증하면서 실크로드를 오가던 무역상들에게 페스트균을 옮겼을 가능성이 크고, 다시 그들이 흑사병을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퍼뜨린 것으로 추정된다.

- 역사 기록에 따르면 1346년 몽골군이 흑해 크림반도의 카파항을 포위 공격하면서 유럽에 흑사병이 퍼졌다고 말한다.

- 1340년경의 유럽 인구는 약 7500만 명이었다. 지중해에서 스칸디나비아까지 페스트 유행병이 발생하면서, 네 해도 채 되지 않아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했다.

 

인구가 감소하자 노동력이 부족해졌고, 영주들은 농노들의 지위를 높여 주거나, 농노와 거래했다. 중세 유럽의 기본을 이루던 장원 제도와 봉건제가 몰락, 14~16세기에 이뤄진 르네상스 운동의 경제적 근거로 작용했다.

 

3차 페스트 범유행(19세기~21세기)

 

- 제3차 페스트 유행은 1855년 중국 윈난성에서 발생했다.

- 페스트는 인간이 거주하는 모든 대륙에 확산되었고, 중국과 인도 두 나라에서만 120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 세계보건기구에 의하면 제3차 범유행은 페스트 사망자가 연간 200명 이하로 떨어진 1959년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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